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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

선물,축복인가?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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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서의 마지막 7년"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친중파(親中派) 티벳 고관의 "선물"을 차갑게 거부하는 브래드 피트에게,고관(高官)은 경악스러워(?)하며 묻는다.
"이 나라에서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소?"
선물을 거부하는 죄악이라니???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그러니까 자본주의가 확고히 뿌리 내리기 이전 사회에서- "선물"이란 새로운 관계의 창출이였다.
그래서 선물을 거부하는 것은 곧 그 사람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자,타인의 사회적 행복을 누릴 기회를 "박탈"하는 죄악이기까지 하였다.
전 근대인들에게 선물의 의무는 곧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는 절대적 척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물을 함으로써 매번 다시 태어나고,매번 다른 삶을 꿈꾸며,매번 다른 관계를-우정,연대,사랑과 같은-창출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물관"은 확연히 달라졌다.
근대인들에게 선물은 "조건부"이며,"부담의 시작"이 되어 버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새것을 위해 헌것을 버리기,결핍 때문에 채우려 하기,등가 교환의 원리에 따라 모든 재화와 노동을 철저히 규격화하고 가격화하기 등등과 같은 자본주의적 속성은 "선물"의 본질 조차도 변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기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당당하게 "선물"로 공인되었던 수많은 선물들이,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찮은 것,혹은 선물이 아닌 것들-특히 금전적으로 계량화가 불가능한 선물들이-로 취급되어졌고...(전근대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선물로 통용되었다.가령 꽃도 바람도,돌도 나무도,심지어 축제와 춤같은 "것들" 조차도 선물이 되었고,본질적으로 선물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선물들의 최종 운명은 "사회적 순환"이 아닌,"개인적 축적"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선물의 의미만이 변형된 것이 아니라,관계의 본질마져도 왜곡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는 광고 카피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신이 그녀(혹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능력"-금전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능력-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식의 논법이 태연히 받아 들여지는 사회에서....

모든 관계는 유일무의한 것이자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충분히 비교 가능하고,그런 관계에 어울리는 정가(定賈)가 있다는 식의 "경제원론"에나 어울릴 법한 거래 방식은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과거 유흥가에서나 은밀하게 통용되었던 "몸 값"이라는 은어가,지금은 공공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니 말이다.

"네가 주는 만큼 나는 준다."는 식의 선물 교환 방식에서.새로운 관계는 창조되지는 않는다.
또 선물의 최종 수혜자가 자신이기만을 바라는 욕망의 고임,즉 축적은 관계의 죽음일 수 밖에 없다.
무릇 관계란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스스로 자살하고 있다.

덧붙여...
화이트 데이.
누군가의 비아냥 그대로 "초콜렛,사탕 재고 처리일"이라는 의미-상술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상술마저도 하나의 축제가 될 수 있다면-그러니까 선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다면.-,그 또한 긍정적이다고 할 수 있겠다만은...
이건 해가 지날 수록 품앗이,혹은 연인들간의 상거래가 되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여자는 발렌타이 데이에 선물(!)하고,남자는 갚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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