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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 그리고 여배우의 전속 의상디자이너.

포항홈페이지제작 미래제작소

이 세상에 옷만큼 진기한 물건이 또 있을까?
매장에 전시되어 있을 때 다르고, 옷걸이에 걸려 있을 때 또 다르고, 홈 쇼핑이나 잡지 사진으로 보는 것 또한 다르고, 직접 입어 보는 경우라 할지라도 누가 입었느냐에 따라, 어느 장소에서 입어 보았느냐에 따라 역시나 얘기가 다르다.
(일반인들이 흔히 후회하는 대표적인 경우: 매장에서 입어 보았을 때는 마음에 들어 샀는데 막상 집에 와서 다시 입어 보면 탐탁치 않거나 홈 쇼핑 책자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주문해 보니 사진으로 보았을 때와 차이가 많이 날 때)

`심은하`의 데뷔 시절 프로그램 하나가 생각난다(이 프로그램을 직접 본 게 아니라 얘기만 전해 들었음).
그녀가 데뷔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그녀를 비롯한 몇몇 신인들을 모아 놓고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단체 인터뷰를 했는데 사회자가 이런 질물을 했단다.
``천 만원이 생기면 뭘하시겠습니까? ``
대부분은 여행을 가겠다, 저축을 하겠다, 부모님께 맡기겠다는 식의 이른바 틀에 박힌 모범식 답안을 제시한 반면 그녀는 ``천 만원짜리 옷을 사겠어요`` 라고 대답해서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했다고 한다.
언뜻 들어보면 허영심에 가득찬 꽤 한심한 답변 같지만 그녀는 역시나 대배우가 될 사람다운 발언을 했다고 본다. 또 가식을 느끼기 어려운 정확하고 솔직한 자기 표현이다.
여배우에게 옷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천 만원이나 할 정도로 비싼 옷, 그건 그녀에게 진정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여배우는 이웃집 여인이 아닌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존재이다.
그런 그녀들이 좋은 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가장 큰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한다.

(여자에게 옷은 선녀의 선녀복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운명을 바꾼다.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를 한 순간에 공주로, `프리티 우먼`의 길거리 여인 `줄리아 로버츠`를 우아한 멋쟁이 여인으로, 미천한 나무팔이 처녀 `서시`를 일약 중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바꾼데는 이 옷이 큰 작용을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계적인 여배우들의 옆에는 항상 의류 디자이너가 있었고, 그들은 여배우들을 평범한 아가씨에서 여왕으로 변신시키는 기적을 만들어내었다. 그만큼 옷이 사람의 이미지를 많이 변화시키니까... 그래서 흔히 신인 여배우를 발굴하면 제일 먼저 옷가게부터 데려가지 않던가?

`그레타 가르보` 옆에는 `애드리안`이, `비비안 리` 옆에는 `윌터 플런키드`가, `마릴린 몬로` 옆에는 `윌리엄 트레빌러`가, `그레이스 켈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옆에는 `헬렌 로즈`가, `나스타샤 킨스키` 옆에는 `끄리스챤 디올`이 있었다.

(`춘희`에서 그레타 가르보가 입었던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는 애드리안의 작품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의상은 월터가, `나이아가라`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방법`, `돌아오지 않는 강`, `7년만의 외출` 등 모든 마릴린 몬로 의상은 윌리엄이라는 남성 디자이너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영화 `상류사회`에서 입었던 옷과 레이니에 공과의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 드레스는 `신부의 아버지`, `랩소디`, `내가 마지막으로 본 파리`에서 엘리자베스의 의상을 담당했던 여류 디자이너 헬렌 로즈가 제작한 것들이다. 또 나스타샤 킨스키가 `안개 속의 달`이라는 프랑스 영화에서 입었던 옷은 끄리스챤 디올의 작품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오드리 헵번` 옆에는 `에디스 헤드`가 존재했다.

`샤넬`이 전 세계 여성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했던 디자이너라면 에디스 헤드는 여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입었던 옷들, 즉 대중과 여성들의 환상을 위해 존재했던 디자이너이다.

그녀의 경력을 살펴보자면 일단 아카데미 의상상 최다 수상자이다.

1948년 처음 시작된 아카데미 의상상은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을 시발점으로 해서 숱한 디자이너에게 그 영광을 안겨왔다.

에디스는 1949년, 두번째 아카데미 의상상 시상식에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멜라니 역으로 친숙한 여배우) 주연의 `여상속인`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뒤 다음 해 `베티 데이비스`, `안 박스터` 주연의 `이브의 모든 것`과 `빅터 마추어`, `헤디 라마` 주연의 `삼손과 `데릴라`로, 또 이듬 해 `몽고메리 클리프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젊은이의 양지`로 자그만치 3년 연속 수상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불과 1년을 건너뛴 53년부터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혜성을 탄생시킨 `로마의 휴일`로, 다음 해에는 역시나 오드리 주연의 `사브리나`로 수상하며 헐리우드 최정상 디자이너로 등극했다.
그녀는 60년 `생의 진실`까지 총 6차례 의상상을 수상했고 이 기록을 깬 이는 당연히 없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총 7차례임. 이브의 모든 것과 삼손과 데릴라가 같은 50년에 발표돼 두 개 부분에서 별도로 시상되었음)

그녀는 어떤 배우건간에 신체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옷을 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리즈와 오드리의 매력을 십분 살렸고 그녀들을 대스타로 만드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젊은이의 양지의 경우 엘리자베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했던데다(이 영화 출연 당시 18세, 10세 때 데뷔한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는 1950년 `신부의 아버지`에서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로 분해 처음 성인 역을 맡았으나 이때까지는 아직 여인이 아닌 딸 역할에 불과했다) 얼굴만 예쁜 인형이라는 평가에 시달리던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사랑에 몸부림치는 여인 배역을 맡은 이 영화가 배우 생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게다가 이 작품을 위해 소속 영화사인 MGM을 어렵사리 뛰쳐 나오는 모험까지 감행했다.

자신의 전속사인 MGM을 뛰쳐 나와 최대 경쟁사인 파라마운트사 영화에 출연하는 모험을 감행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그 1호작이 된 영화 `젊은이의 양지`(그녀는 이 작품 출연을 위해 MGM사에 적을 둔 채 파라마운트사로 잠시 몸을 옮겼음. 당시에는 영화사들마다 전속 배우들에 대한 규제가 심했음).
그녀는 이 작품에서 가난한 직공인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사랑에 빠지는 부잣집 외동딸 역으로 분해 청순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뽐내어 그녀를 세기의 미녀라고 칭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했다. 또 데뷔 이래 처음으로 뜨거운 여인 역을 맡아(그 전까지 리즈는 소녀 배우였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세기의 미녀이자 만인의 연인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녀의 모습은 외모 자체도 뛰어났지만 의상도 한 몫 담당했다. 이 의상을 에디스 헤드가 담당했다. 그 결과 그녀는 오스카 의상상도 수상했다.
그녀 에디스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리즈는 마스크도 빼어나지만 특히 가슴선과 허리선의 아름다움이 유난히 뛰어나다. 단점이 있다면 키가 다소 작고 다리가 짧다는 것인데 그래서 가슴과 허리를 최대한 강조했으며 다리를 완전히 덮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제작했다. ``

어쨌거나 리즈는 에디스에 의해 여신으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인체에 중심을 두어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 단점은 최대한 커버하는 다자인을 그 옛날에 시행하는 앞선 기질을 선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 가장 뛰어났던 디자이너로 폭스사 전속 디자이너였던 `윌터 플런키드`도 들 수 있다.
그는 52년작 `나이아가라`에서 여체의 굴곡과 신체 내부가 살짝 드러나 보이는 붉은 드레스로 마릴린 몬로의 섹시한 요부 이미지를 한껏 과시하게 했고, 54년작 `7년만의 외출`에서는 플리츠가 잔잔한 하얀 풀 스커트를 제작해 입혀 백치미 넘치는 마릴린을 탄생시켰다-이 풀 스커트가 바로 사람들이 몬로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인 지하철 환기통 바람에 스커트가 휘날리는 명장면에서 입었던 옷이다.

중요한 점은 이렇듯 뛰어났던 디자이너들인 에디스와 윌터, 헬렌 등을 요즘 디자이너 지망생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과거의 복식 디자이너인가 보다`라고 할 정도...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이라는 배우를 탄생시켰는데 이 탄생 뒤에는 에디스가 있었다.
그녀 에디스는 파라마운트사의 전속 디자이너였기에 자동으로 오드리를 맡게 되었고(당시에는 디자이너도 전속 제도가 있었음) 그녀의 독특한 체형을 매력으로 승화시켰다.
오드리가 데뷔하던 당시에는 리즈나 마릴린 몬로처럼 이른바 육체파, 글래머 스타일의 여배우들이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는데 연필처럼 가는 몸매에 역시나 젓가락처럼 가는 팔과 다리, 그에 비해 넓은 어깨를 지닌 그녀가 유별나 보였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참고로 내가 어느 영화 관련 서적에서 알아낸 세 여배우의 신체 사이즈:
엘리자베스 테일러: 36-21-36, 마릴린 몬로: 37-24-37, 오드리 헵번: 32-20-32)
이 중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전성기 시절 사이즈이고, 마릴린이야 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니 할 말 없는데 오드리는 이 사이즈를 눈 감는 순간까지 그대로 유지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굶주림으로 인해 절대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 된 탓이지만 이유야 어쨌건 두 여배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아이와 어른 사이즈인 셈)

이런 빈약한 몸매를 오히려 귀엽고 보이시한 독특한 매력으로 승화시켜 뒤를 이은 `사브리나`(이 영화에서 오드리가 입고 나왔던 꽃무늬가 새겨진 흰 드레스는 리즈가 젊은이의 양지에서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부여한다. 둘 다 흑백 영화이건만 어찌 그리도 청초하고 화사한 느낌을 잘 살려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다. 또 검은 색의 일명 `시가렛 팬츠`는 일대 붐을 일으켰다 이 시가렛 팬츠는 에디스가 그녀의 빈약한 몸매를 강조하고자 일부러 그렇게 제작했다 한다), `퍼니 페이스`(우리 나라 개봉시 제목 `파리의 연인`,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가 이 영화에 크게 매료되어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 이 영화에서 오드리가 입었던 타이트한 스웨터와 바지는 5,60년대에 걸쳐 대유행했음), `티파니에서 아침을`(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겠지?) 등에서 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오드리의 이 뛰어난 패션 감각 뒤에는 디자이너 에디스가 있었다.

어느 자료에 보면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부터 티파니에서 아침을까지 오드리의  의상은 `지방시` 또는 `입생 로랑`이 담당했다고 한다. 또 아카데미 자료에는 에디스만 당당 디자이너로 기록되어 있다.
내 생각에 공동 제작이 아닌가 한다.
당시 에디스는 파라마운트사에서 제작되는 모든 영화를 담당했던터라 혼자 힘으로 그 많은 의상을 제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수 백벌이나 소요된 대작 `삼손과 데릴라`와 유난히 화려한 의상이 많이 등장했던 `이브의 모든 것`으로 한 해에 의상상을 두 개나 받았겠는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합작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중들의 영원한 동경인 여배우들을 여신으로 승화시켰던 에디스 헤드, 그녀는 분명 헐리우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칭찬이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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